[스크랩] 만경강의 역사(상)

2014. 2. 27. 09:45기타

만경강 이야기 땅과 생명...그리고 江]만경강의 역사
호남의 젖줄·곡창지대·삶의 터전 자리매김...한국 고대문화·역사 꽃피우다
▲ 만경강 고지도(위).
만경강은 호남의 젖줄이자 삶의 근간으로 이 땅의 역사를 주도하였다. 만경강은 크게 전주천· 익산천·고산천이 삼례지역에서 합류하여 본류를 이루는 강인데 이들 지류가 각각의 지역의 역사를 만들어 강의 역사를 형성하였다.

만경강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을 짚어보면 그 한 줄기인 익산천은 고조선의 준왕이 바다를 통해 현재의 익산(금마) 일대로 피난하여 우리 역사에서 마한이 역사 정통성의 근간으로 자리잡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는 근대 대한제국 명칭의 역사적 근거로서도 활용되었는데 그 뿌리에 만경강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익산∼전주 일대의 발달된 청동기문화와 농경문화가 만경강유역 물줄기를 둘러싸고 한국역사의 대표적인 거점지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백제시대의 경우 만경강 줄기가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 논의되고 있는 금마지역을 흘러 백제 무왕(서동)과 선화공주의 국경을 뛰어넘은 사랑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서동이 백제의 무왕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경제적 부를 제공한 터전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가 망한 직후 고구려 부흥군들이 건국한 ‘보덕국(報德國)’이 금마에서 고구려부흥의 마지막 꿈을 키우며 살았던 고구려 문화의 흔적을 이 강줄기에 남겼다.

만경강의 발원지 및 지류가 연결되는 고산천의 상류지역은 백제의 수도 부여지역으로 연결되는 고대 육상교통로로서 수많은 백제 산성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특히, 백제멸망시 백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신라군을 넘게해서는 안된다고 백제의 충신 흥수가 지목한 탄현(炭峴)이 상류지역 부근에 위치하여 백제사의 마지막과 만경강 줄기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백제부흥 전쟁을 주도한 중심 거점인 주류성(周流城)이 바로 부안 변산반도로 비정되며 이들을 원조하기 위해 왜(倭:일본)에서 온 지원군이 나·당연합 함대에게 궤멸을 당해 부흥전쟁이 종식된 백강구(白江口) 전투 현장이 만경강과 동진강, 금강이 만나 이룩된 하구지역으로서 만경강 유역의 역사적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이와 함께 만경강의 또 다른 물줄기인 전주천이 흐르는 전주 일대는 후백제 견훤의 도읍이자 조선왕조의 관향으로서 그 역사적 중요성이 부각되는 곳이다. 특히, 해양왕국 백제의 부흥을 꿈꾸었던 견훤은 도읍 전주에서 만경강 물줄기를 이용하여 후당·오월 등 중국과 일본으로 사신을 파견, 해양교류의 통로로서 만경강을 활용하였다.

이는 동북아 해상왕국을 이루었던 장보고가 해상왕국 백제의 전통을 계승하였던 것을 다시금 부활시키고자 한 것으로 그 중심에 만경강이 위치하였던 것이다. 이같이 만경강은 고대사회에는 바다로 진출하거나 교류하였던 해상교통의 동맥으로서 우리 역사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 만경강이 관류하는 김제·만경을 중심으로 한 호남평야 지역은 우리나라에서 철원·평강평야와 함께 지평선이 보이는 단 두 곳 중의 하나로 삼한시대부터 벼농사가 진행된 곳이며 최대의 곡창지대였다. 전근대사회는 농업 생산만이 유일한 생계방식이었던 상황에서 농경을 위한 수자원의 확보는 생존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따라서 이 지역은 조선시대 농업생산 거점 및 내륙수로의 중심으로 기능하였고 일제시대에는 식민지 농업경영의 중심지로서 대아댐을 건설하고 만경강을 직강화하였으며 농수로 개발 등을 통해 효율을 극대화 하였다.

특히, 만경강 유역권의 토지는 대부분 왕실 및 관청 토지로서 일반농민의 경작권이 소유권처럼 보장되었던 토지였는데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으로 총독부에 토지소유권이 넘어갔고 다시 이를 일본인 지주에게 불하하여 대규모 일본농장이 집중 육성된 지역이기도 하였다.

특히, 일본은 식민지농업 경영의 활성화를 위해 만경강 상류에 당시 동양 최대의 농업용 댐이었던 대아댐을 만들고 직강화 및 농로·수리관개 시설을 집중적으로 건설하여 근대농업 시스템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에 따른 수확은 일본으로 대부분 반출되었고 전통적인 만경강의 양상은 크게 왜곡되었다.

그리고 광복 이후 만경강 관련 지역은 동진강유역권과 함께 개간, 간척사업이 진행되어 계화도간척과 새만금간척을 통한 국토변혁의 역사가 현재 진행되고 있다.

현재 우리가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만경강(萬頃江)’이란 표현은 우리의 전통 역사서에는 나타나지 않는 명칭으로 일제시기 만경현과의 인접성 때문에 일본인들이 임의로 설정한 명칭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1870년대 제작된 ‘대동여지도총도’에 현재의 만경강을 ‘사수(泗水)’라 표현하고 있으며 1906년 완성된 ‘증보문헌비고’ 여지고(輿地考)의 산천(山川)조 총설(總說) 호남연해제천(湖南沿海諸川)에서는 우리 나라 모든 강의 원류와 구성등에 대한 설명을 진행하면서 현재의 만경강의 본래 명칭이 사수강(泗水江)임을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특히, 사수강은 공자의 고향 곡부의 강 이름이자 한나라를 건국한 한고조 유방의 고향인 풍패지역의 강 이름으로서 유교문화의 발상지이자 왕조의 발상지를 상징하는 강 이름이었다. 따라서 만경강의 본 이름 사수강은 조선시대 왕조와 문화발상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던 개념이란 면에서 그 의미를 새롭게 부각시켜 현재의 ‘만경현 앞을 흐르는 강’이라는 격하된 의미로서의 만경강 명칭과 병기하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따라서 만경강유역은 한국 고대문화의 요람지역인 익산(미륵산)∼전주(모악산)을 관류하는 강으로 농업생산, 군사방어, 교통로, 문화거점의 중심으로서 만경강 유역권내 역사유적 연계프로그램 개발이 요청된다.
출처 : 쌀장수매돌
글쓴이 : 엥케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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